7월의 예술 칼럼 (1)

바이러스가 창궐한 뉴욕에서 그래피티가 유행하고 있다.

Long Island City

70년대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들은 벽을 되찾고 싶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뉴욕 시민들이 마지못해 3월 뉴욕시의 봉쇄를 받아들였지만 한 지역 사회는 이를 두팔 벌려 환영했다. 바로 그래피티 작가들이다. 버려진 상가들은 수천개의 빈 캔버스를 제공하고 있고, 젠트리피케이션화 되고 있는 지역의 기존 벽화들은 거리들이 비판으로 가득찰 때 함께 덧칠되었다. 

“예술이 시대를 지배하는가 아니면 시대가 예술을 지배하는가?”라고 1970년대에 시작된 ‘크래쉬‘로 알려진 그래피티 작가인 58세의 존 마토스가 물었다. 그는 “예전에는 거리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며” 멋지고 훌륭한 허가를 받은 그림들로 거리는 매우 깨끗했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뿌리로 돌아왔다.”

그가 살던 시절, 작가들이 지하철 칸 전체를 덧칠하는 야간 그래피티 태깅은 위험하고 불법이었다. 많은 뉴욕 시민들에게, 그것은 쇠퇴하는 도시의 특징이었다. 그 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미술관 전시관이나 상업적 벽화 작업으로 옮겨 갔다. 그 때 시는 그래피티를 공공 시설 파괴로 간주했으며, 1989년까지, 메트로폴리탄 교통 당국은 이러한 그래피티 태깅에 대한 승리를 선언했다.

미술 경매의 A to Z

소더비에서 진행한 미술 경매의 한 장면 @artnet's news

처음 미술 경매장에 방문했던 건 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이다. 

당시 대학교를 재학하며 좋아하는 작가의 소식을 꾸준히 찾아보고 있었는데, 국내의 미술 경매에 그 작가의 작품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당시 미술 경매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경매장에 대한 위화감이 먼저 들면서 ‘내가 그 자리에 가도 되는지’를 생각했던 것 같다.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홈페이지에 회원가입을 하고 전화로 방문 예약을 했는데, 우려와 다르게 너무나도 친절했던 경매회사의 안내에 용기를 내고 평창동의 경매장까지 찾아갔다. 당시에도 미술 경매는 꾸준히 인기였지만, 지금처럼 대중화가 되기 전이었기에 쭈뼛거리며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비록 학생의 신분이라 억대의 작품을 구매할 능력은 안되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서로 차지하려고 했던 광경을 바라보는 것이 매우 흥미진진했다.

오늘날에는 그때보다도 더 쉽게 미술 경매에 대한 소식을 뉴스나 인터넷으로 접할 수 있다. ‘낙찰 최고가/ 신기록’에 집중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이지만, 기자의 의도대로 한동안 이슈가 되면서 경매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물론, 최고가에만 집중하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경매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되지만 말이다. 

미술은 우리의 일상과 가깝게 있다. 그만큼 미술 경매도 활발하게 거래가 진행되며 미술에 대한 구매욕을 이끌고 있다. 누군 가에게는 가슴 뛰는 스릴과 탄식을, 또 다른 누군 가에게는 미술에 대한 흥미를 일으키는 ‘미술 경매 ‘란 무엇일까. 

그들은 왜 천으로 얼굴을 가렸을까

르네 마그리트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땐, 수많은 영화의 영향으로 ‘죽음’이 연상되었다. 얼굴을 천으로 가리는 모습은 주로 영화에서 공개처형을 앞두었을 때 등장했기 때문이다. 두 인물의 얼굴이 천으로 가려진 것은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했으며, 그럼에도 키스를 하는 모습이 애틋한 느낌보다는 무섭고도 음산했다. 두 인물이 죽음이 더 크게 다가오면서 키스보다는 이후의 상황이 상상되었다. 

어느 날 문득 다시 만난 이 작품은 매우 로맨틱했다. 코로나 19라는 전염병으로 마스크를 쓰며 바라보는 요즘의 연인들도 연상되었다. 마치 천 너머의 서로를 확인하듯 ‘그럼에도 사랑하는 모습’이 굉장히 로맨틱 작품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후보다는 현재의 상황에 집중되면서, 부러울 정도로 애틋하고 달콤하게 보였다.

글을 쓰는 지금은 또 다르다. 이제는 ‘본인의 얼굴을 가려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며 천으로 얼굴을 가린 이유에 생각이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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